한연욱

Time :
2013.04.20 09:08
(59.25.217.180)

오늘 아침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며칠 전에 '레미제라블'을 주문형 비디오로 보았다. 혁명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화해와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았다. 화해..


나도 소위 말하는 야한 비디오를 학창시절에 본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야릇한 느낌을 가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비참한 자들"이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팡틴'이 경제적으로 궁핍에 처하게 되자 딸을 위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고, 이를 뽑아서 팔다 나중에는 남자들을 상대해야만 하는 장면에서 자신의 비참함을 노래하는 대목에서는 그 어떤 야릇한(?) 느낌은 없었다. 그녀의 앙상한 갈비뼈에서 그녀의 비참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가 처한 비참함에 연민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비참한 자들"에서 몸파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진실에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뮤지컬 형식을 띤 영화라서 마음의 부담을 조금 더는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회복적 정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피해자의 목소리와 요구를 듣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전 근대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로 떼어놓고 가해자에게 추상적인 처벌을 가하는 오늘날의 형법체계가 나오기 전에 존재하던 방식이기 때문이다.


어제 우리 학교에서도 여학생들간의 따돌림으로 인한 학교폭력사건으로 피해학생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되었다. 본인이 원해서 전학을 가는 것이지만 바라보는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왜 피해 학생이 전학을 가야 하는가? 해를 끼친 학생은 추상적인 벌만 받으면 그만일뿐,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를 끼쳤는지 왜 가슴깊이 느껴보도록 하지 않는가?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팡틴"이 처한 비참함을 느낀 이후, 여성을 상품화하는 우리 사회에서의  "팡틴"들도 나름 살기위해서 발버둥치고 있고, 가난함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진실이다는 사실에서 마음이 무겁고 안타깝고 불쌍하고 이 사회가 얼마나 잔인하고 못됬는지 알게되었다. 


우리 인문계 고등학교라는 곳도 사실은 성적향상에만 매달리는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못된 곳인지 깨달았다. 나도 거기에  일정한 협력을 해왔던 게 분명하다. "자베르" 경감처럼 살아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기도할 따름이다. " 주님, 부디 저를 선한 길로 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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