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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굿바이(Good & Bye)>를 보았습니다. ‘염습, 납관’. 모든 일상을 멈추고 황망한 마음으로 달려간 장례식장에서나 들을 수 있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같은 시공을 살다간 사람에 대한 예의를 보게 됩니다. 살아 있을 때 지낸 세상의 마지막 인사라 할 수 있지요. 또한 아주 먼 곳에 살던 반가운 친구나 친지를 만나지요. 망자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보면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예기치 못한 즐거움이 솟아납니다. 미워한 사람을 만나면 ‘왜 그랬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하며 서먹한 미소를 주고 받지요. 그 곳에서는 살아남은 자의 화해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첼로주자였던 ‘다이고’는 갑작스런 오케스트라 해체를 통보 받습니다. 어머니께서 남겨준 고향집에서 아내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여행가이드’구함 이라는 광고를 보고 NK에이전트를 방문합니다. 납관절차를 통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고 작별해야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아내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전문 납관사의 길에 들어선 다이고. 어릴 때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정성스럽게 납관식을 치룹니다. 어린시절 끊어진 부자지간의 정을 이어준 통과의례입니다.

아름다운 첼로선율로 마음 따뜻해져 눈물 난 게 아닙니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를 보면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연민과 절망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공교육의 핵심인 학교현장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있는지 영화관을 나서면서 생각해봅니다. 마음에 뭔가가 들끓고 있는데 어떻게 풀어내야할지 알 수 없어 끙끙거립니다.

추적60분을 통해 슬픈 사고를 보았습니다. 강릉 N고등학교(전문계) 2학년 학생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학생회장이 조회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을 지도과정에서 일어난 事故(사고)였습니다. 학생은 조회시간에 매점에서 과자 사먹다 학생회장에게 걸렸습니다. 그 후에도 교실에서 컴퓨터로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PD는 학교폭력이니 학교책임이니 보다는 우리 교육를 점검해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과도한 입시경쟁위주 교육의 결과 전문계 고등학생들의 소외와 무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학교에서 삶과 배움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는 아이들과 씨름하는 교사의 좌절을 옹호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속에 들끓고 있던 그 무엇의 실체를 알았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 없는 사회와 학교시스템에 대한 분노입니다. 학교가 이렇게 황폐해져감에 대한 슬픔이었습니다. 교과부의 <사교육경감을 위한 10.28정책>은 더욱더 아이들을 획일적인 경쟁으로 몰아넣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우길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학교는 실수를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어야 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 교육은 만15세 고등학교 입학을 끝으로 삶의 향방을 결정짓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은 비정규직과 알바생으로 88만원세대가 되어갑니다. 삶의 희망이 없으니 무기력해져갈 수 밖 에요. 성공 신화를 다룬 많은 책에서 아이들 자신의 노력 부족을 이야기합니다. 기업에서 요구하는 꽃이 되기 위해 성형수술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한국 사회의 기성세대요. 학교 교사로 부끄럽습니다.

우석훈씨가 말하는 세대간 착취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와 학교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렸습니다. 세계 자살율 1위라는 보도에는 사람들은 꿈쩍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자라난 10대와 20대들은 더 잔인한(?) 사회를 만들어가지 않을까요?

놀라운 경제성장의 결과로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 시스템은 급격한 성장위주의 정책으로 형평성의 문제를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가난한자, 소외된 자, 어린이, 학생에게 개인의 경제여건과 관계없이 교육에의 공평한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기회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학업비용을 국가에서 지원해야합니다. 우리생활을 돕는 대다수는 전문계 고등학교 졸업한 기술자들입니다. 그들이 긍지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흐름에 대학생도 예외가 아닙니다. 영어를 위해 휴학 후 외국생활을 선택하는 것은 기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격증을 갖추어도 일할 데가 없습니다. 중소기업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교사들이 아이들을 기본적으로 가르쳐야할 대상이나 숫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그리고 10대의 후반에 접어든 큰 아들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입니다.
공립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미안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대한 미안합니다.

이 미안함은 저 만이 아니라
우리 기성세대 모두가 가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사들은 하나님앞에 가슴치며 회개하며 기도해야합니다.

이런 미안함의 공감이 사회에 형성이 될 때 만이
교육에 대한, 사교육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이고는 ‘미래의 꿈이라고 믿었던 것은 진정한 꿈이 아니 였나 보다’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미래의 꿈을 위해서 지금은 아침부터 저녁 11시까지 공부해야한다고 말하는 것을 이제는 멈추어야합니다.
아이들은 지금도 삶을 영위하는 고귀한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없는 집과 마을을 우울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골목골목에서 뛰어놀고 노래 부르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상위5%를 위한 죽음의 레이스를 끝내야합니다.
그것을 위해 정부, 학교, 각계 각층에서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거창하게 우리 사회의 미래가 아니라 우리가 인간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공동체는 어떻게 하나님과 아이들 앞에 서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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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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