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방학에도 여름은 오는가

                                                               by 김유경

 

지금은 학기중 - 빼앗긴 방학에도 여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전자파를 받고

방학보충시간표와 특강시간표가 맞붙은 곳으로

거미줄 같은 뇌회로를 따라 비몽사몽 수업계획서만 짠다

 

입술을 다문 부장쌤님아 교감쌤님아

내 맘에는 하고 싶어서 방학보충수업을 준비하는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시켰느냐 누가 시켰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부장쌤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학생도 놓치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비주지교과 쌤들은 교무실 너머 한량같이 휴게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정리된 수업자료들아

간밤 자정이 넘어 검색했던 연구자료들로

너는 삼단 같은 내 약점들을 감췄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방학이라고 해외연수 가는 나쁜 동료쌤이

나를 놀리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보충수업 넘치는 주지교과 쌤들 격려 좀 해야지

아주까리 무스를 바른 쌤이 동아리 수련회로 갔던 그 곳이라도 가보고 싶다

 

내 손에 특강 명단을 쥐어 다오

(나 좋다고 날 선택한) 살진 송아지 같은 순진한 이 학생들을

허리가 부러지도록 즐겁게 수업도 해주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방학보충수업 처음 해 본 아이와 같이

등하교시간도 모르고 끝도 없이 헤매는 내 혼아

무엇을 하느냐 어디로 가느냐 무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땀내를 띠고

창백한 웃음 창백한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퉁퉁 부은 종아리를 달래며 하루를 꼬박 앉는다 아마도 여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방학을 빼앗겨 여름조차 빼앗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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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2
등록일 :
2013.07.29
12:06:58 (*.251.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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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나무88

2013.07.29
13:48:20
(*.158.208.30)

유경샘!

짱 입니다요~~^^

감동의 폭포수가 이 여름을 시원하게 합니다.

감히 평하건데 21세기 학교현실을 꼬집은 문제의 서사시로 이름을 남길 듯...ㅋㅋㅋ

Joy

2013.07.31
09:14:09
(*.251.19.13)

하하하~ 감사합니다. 보충수업하다 쓰러진 저를 교단에 고이 묻어주시길.. ㅋㅋ

한연욱

2013.07.30
11:22:05
(*.115.168.206)

유정쌤 100% 공감^^

교사들 노는(?) 거 안좋아하는 여론이 많아서, 보충담당교사들이 수업을 해줘야 다른 분들이라도 맘편히 쉬겠죠.

그렇지만, 교사도 감정노동자인데, 이렇게 계속 돌리면 번아웃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선지 저도 요즘 수업하다가 화가 불쑥 불쑥 나기도 하네요. 참아야죠 뭐...

저에게 있어서 유일한 정서회복방법은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 외에는 현재 없는 듯 합니다. 

불철주야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는 진짜사나이들에 비하면야 호강이죠. 군생활을 생각하면서 견디자 아자 아자!


Joy

2013.07.31
09:09:09
(*.251.19.13)

저희가 감정노동자였기에 이렇게 힘든 거였군요. 주변에서 일반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방학도 존재하느냐고 타박을 줘서리 감사하며 보충수업하려고 마음을 먹어보지만.. ^^;; 3주동안 105시간, 매일 7시간씩 수업하려니 정말 죽을 맛이네요. 수련회 가려고 4주 105시간 수업을 3주만에 해내고 있는 중.. 성대결절까지는 아니더라도 헐.. 목이 힘들긴 하네요. 그리고.. 쌤 못 가시는 수련회, 제가 가서 은혜 만땅 받아올게요 ㅋㅋ

양수미

2013.07.30
23:45:26
(*.182.70.162)

아니... 저렇게 깨끗한 책상에서 이렇게 걸쭉~한 시가 나오다니요..

놀랍습니다.

뒤늦게 국문학에 빠진 비전문적인 교사로서 한참을 감탄하다 갑니다.

Joy

2013.07.31
09:12:14
(*.251.19.13)

감사합니다, 감탄의 말씀.. 그리고.. 보충수업 폭탄에 쓰러져서 유서 비스무리한 걸 남긴 겁니다. 이 몸은 보충수업하다 쓰러졌노라~ 하면서.. ㅋㅋ

이형순

2013.08.06
20:30:03
(*.228.185.131)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네요... ^^;

안준길

2013.08.15
20:43:41
(*.251.67.33)

유경샘. 그대는 최근 골가뭄에 시달리던 국대에 나타난 한국형 메시요, 잠자던 우리 울분을 깨우는 시인이야요. 샘과 같은 조에서 공부했던 것이 무한 영광입니다.  그간 쌓인 분을 다 풀고 갑니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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