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로 하여금 신의 존재를 긍정케 하는 것은 무엇일까? 충족된 욕망, 극한의 결핍, 관계의 단절, 소통의 어려움 등이 떠오른다. 권태로움과 무력감도 포함되리라.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이다.”로 시작되는 신경숙씨의 새로운 소설[엄마를 부탁해]는 나의 엄마 생각하게 한다. 그녀는 처음에 글이 잘 써지지 않아 힘들었다 한다. 그런데 ‘어머니’를 ‘엄마’로 바꾼 뒤에 흐르는 물처럼 글이 솟아나왔다고 이야기 한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 학교는 유난히 바쁘다. 피곤해하는 나를 위해 칠순을 바라보는 엄마가 나의 집으로 왔다. 퇴근해 집에 도착하면 뿌옇던 유리창들이 말갛게 닦여져 있었다. 연신 걸레를 들고 방을 훔치면서 엄마는 “배고프지? 언제 저녁 먹을까?” 이야기 한다. 하루종일 집안을 하느라 얼굴을 발갛게 상기되어있다.

그 날 오후 엄마와 함께 금오산호수로 갔다. 자판기 커피를 한잔 씩 들고 호수가 평상에 앉았다. 엄마의 어깨가 너무나 작아 보이고 열려보였다. “엄마, 너무 일을 많이 하면 힘들어. 적당히 해”라고 건네었다. 엄마는 희미하게 웃으며, “나는 괜찮아. 내가 너한테 미안하다. 해준 것도 없어”라고 하였다. 난 엄마가 내 옆에 이렇게 살아주셔서 의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였다. 나의 엄마는 삶이 힘겨울 때 마다 소설 속 엄마처럼 일을 하면서 견.디.어.내.었다. 자라면서 동네사람들은 우리 집 마당에 떨어진 밥알도 주워 먹을 만큼 깨끗한 집이라고들 하였다
잔잔한 물위를 노니는 오리들을 보며 엄마와 나는 지난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의 실업과 외도, 그런 엄마에게도 사랑이 있어 함께 도망치자고 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그 때 엄마가 그 사랑을 따라 나설 수 없었다고 하였다. 우리 삼남매의 새까만 눈이 밟혀서 떠나지를 못했다. 엄마 없이 자란 엄마의 아픔을 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 고단한 인생을 견디어 왔다고. 어릴 적 외할머니를 잃고 엄마는 외로웠다. 자랄 때 물질적 어려움을 겪지 않았지만 엄마의 엄마와는 친밀함을 경험하지 못하던 터였다. 엄마는 사람이었다. 아니 사랑을 아는 한 여인이었다. 엄마를 엄마가 아니라 같이 인생을 걸어가는 여자로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 고마워요’라고 할 때 엄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는 6시쯤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다. 베란다 찬 바닥을 발로 디뎌서 쌀을 담았다. 쌀을 씻는데 갑자기 ‘나는 지금 일어나 아침 준비하는데 이렇게 몸이 무거운데. 엄마는 어떻게 새벽 5시에 매일 같이 온 식구의 아침을  준비하였을까?’ 그 즈음에 난 밥하는 것이 지겨워지고 귀찮아하였다. 그 때 내 안에 엄마의 인내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래 엄마도 힘겨웠을 것이다. 연탄불에 밥을 하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했을까?’ 당연하게 느껴졌던 엄마가 친구해온 노동의 힘겨움이 느껴졌었다. 밥을 지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오늘 오후에 엄마에게 전화해야지. ‘하나님! 엄마가 기쁘게 힘겨움을 이기신 것처럼, 제가 엄마를 따라서 즐겁게 아이들 밥을 지을 수 있게 해주세요.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의 엄마의 삶이 소설속의 엄마의 삶과 너무나 닮아있었다. 소설의 엄마는 잃어버린 뒤 가족에게 실존을 찾는다. 감사하게도 나의 엄마는 아직도 내 곁에 계신다. 비록 무릎관절이 삐걱거리고 통증으로 힘들어 하시만 나의 전화에 반갑게 대답하신다. 이제 누구보다 가장 가까운 어머니는, 아니 엄마는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으로 이끈다.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더 깊이 인식한다. 나는 그런 엄마인가하는 질문에는 부끄럽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며,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살고 있는가 질문하게 하는 책을 만났다. 질문하며 자신에게 되뇌이며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심에 감사한다. 이 땅에 모든 어머니처럼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하여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시려 가장 낮은 땅 위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이 감사하다. 무엇보다 이 아름다운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함께 걸어가는 여러분을 만나 감사하다.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등장하는 피에타상(성베드로 성당)을 통해 죽기까지 희생하는 엄마는 세상 죄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과 겹쳐진다. 미켈란젤로가 죽기 전에 만들고 있었던 미완성의 피에타가 생각난다. 예수님의 시신은 길게 늘어져있고 예수를 부축하여야할 마리아는 오히려 시신에 얹혀있는 듯 불안정하다. 그가 23세 약관의 나이에 만든 아름다운 균형과 완전한 모습은 사라지고 자신의 영혼의 절절한 간구가 들리는 듯하다. 잃어버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아픔이 더 크게 울리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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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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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희

2008.12.26
11: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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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샘, 넘 감동이네요. 저도 엄마가 감당한 무거운 삶을 늘 생각해요.나는 6식구 밥해먹는 일도 그렇지만 새벽기도 나갈때 그런 맘이 들어요. 평생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를 하셨던 엄마, 기도하시면서 "아무래도 박대통령이 죽을것 같다."하셨는데 그대로 되었던 일등...이제 새벽기도하시던 아버지도 엄마도 천국에 가셨는데 그 기도를 이어가야 하는데 부족한 이 모습을 어찌해야하는지...지난 여름 샘과의 만남을 늘 생각해요...언젠가 또 그렇게 한번 만날 날 있겠죠...감동 나눠주어 감사...

강영희

2008.12.26
11:45:14
(*.42.251.5)
"엄마를 부탁해" 살까 말까 망설였었는데 사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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