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껴보지 못한 사랑
- 영희 이야기

복학생 언니
영희는 복학생이다. 그래서 2학년 동급생들이 언니라고 부른다. 덩치도 크고 마음도 넓게 생겼지만 그다지 학교 생활에 흥이를 갖는다든가, 또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영희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다른 시간과 달리 내가 가르치는 국어 수업 시간에만 잘 웃는다는 것을 발견한 후였다.
교사가 수업을 진행할 때 실력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유머와 감각이다. 즉, 화술로 판가름나는 어휘구사 능력은 미리 예정한 생각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순발력에 관건이 있다.
그러나 아이들식으로 너무 썰렁한 이야기를 하면 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을 산다. 미운 비웃음이 아니긴 하지만 교실 분위기를 말 그대로 썰렁하게 다운시키기도 한다.

썰렁의 극치예요
아이들이 분에 넘치게 유식하면 이렇게 농담을 한다.
"우와, 너 대단한데…. 대가리가 단단해. 맞지?"
아이들은 "뭐예요? 선생님. 와!…."하고 웃는다. 여기에서 놓칠세라,
"뭐가 어때서…. 너도 참 엉뚱하구나. 엉덩이가 뚱뚱해."
이러면 분위기가 약간 다운된다. 그래도 얼굴에 철판 깔고 한 마디 더 한다.
"왜?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니까 허무하니? 허리가 없어? 너희들?"
이 정도 되면 교실은 갑자기 아수라장이 된다.
"뭐예요? 선생님. 그만 해요. 썰렁의 극치예요."
이럴 때 끝까지 웃는 아이가 있다. 다른 아이들은 썰렁함에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배를 움켜 잡고 허리를 굽히며 웃는 아이. 그 아이가 다름아닌 영희다.

쪽지 편지
그런 영희와 가깝게 된 것은 학기초 수업 시간 중 백지를 나눠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대로 쓰라고 했을 때 영희가 나에게 쪽지 편지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작년에 복학을 해서 1학년 때는 학교도 많이 안 오구 별 흥미도 없었어요. 2학년이 되면서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시작했는데 따라가기가 힘이 들어 하나씩 포기를 하게 돼요. 아무래도 동생들과 수업하기 불편한 것도 있구요. 정말 제 자신이 한심스러울 때가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제가 좋아하는 친구가 생겨 공부에 더 흥미가 붙고 있어요. 제가 노력하는 만큼 정말 좋은 결과가 있겠죠?"
그저 평범한 고민이었다. 공부도 잘 하고 싶고, 후배들과도 잘 지내고 싶은 그런 소박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쪽지를 읽으면서 자지러지게 잘 웃는 영희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난생 처음예요
방과 후에 영희를 불러 자리를 같이 했다. 교실에서 보는 것과 달리 영희는 약간의 경계심을 갖는 듯 했다. 아마도 어색함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복도나 교실, 교정 등에서 만나 얘기할 때는 자연스러운 아이들이 이렇게 교사와 단 둘이 자리를 할 때 갖는 불편함.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한 아이는 이렇게 고백한 적도 있다.
"선생님, 고3이 될 때까지 선생님과 이렇게 단독으로 만나 깊은 이야기를 나눈 것은 난생 처음이예요."
아이들의 지도는 관심으로부터 비롯된다. 관심은 아이들을 만났을 때 훈계나 질책이 아닌, 듣는 것이어야 한다. 비판이나 판단, 정죄를 하기 전에 충분히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줄 아는 교사여야 한다는 것이다.

집에서 놀아요
나는 과자와 음료수를 건넸다. 예상하지 못했던 선생님의 환대였는지 영희는 얼굴마저 붉혔다.
"영희야. 진작부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 그래도 넌 언닌데 학급에서 후배들과 생활하기 불편한 점이 많지?"
"괜찮아요, 선생님."
"그래, 다행이구나. 네가 보내준 쪽지 편지를 참 기쁘게 읽었어. 그리고 반가웠고…. 요즘 너희들은 메일을 많이 사용하지 않니? 그래서 펜으로 쓴 글을 보면 무척 반가워."
부드럽게 다가가는 내 말에 영희는 마음이 누그러지는 듯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나는 영희의 가정을 살폈다.
"영희 아빠는 무슨 일을 하시니?"
영희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러나 곧 예의 그 밝은 목소리로 하지만 관심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놀아요. 집에서…."
직감적으로 평탄하지 않는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아빠에 대한 반감마저 느껴졌다. 영희에게 있는 아픔이 나에게 전해왔다. 나는 말을 이었다.

동생이 블쌍해요
"영희가 아빠에 대해 좋은 감정이 아닌 것 같구나. 괜찮다면 너희 가정에 대해서 이야기 해줄 수 있겠니? 너무 힘들면 안해도 좋지만…. 선생님은 꼭 듣고 싶은데."
영희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내 생각을 굳혔는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저는 지금 할머니하고 아빠하고 6학년 여동생하고 이렇게 살아요."
"그래, 그렇구나. 근데 엄마는?"
"엄마하고 아빠는 이혼했어요. 저는 엄마하고 살다가 엄마가 아빠한테 가라고요. 엄마는 지방에 가서 돈 벌어야 한다고 해서…. 얼마 전에 아빠한테 왔어요."
영희의 입이 열리는가 싶더니 일사천리로 이야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빠는 왜 왔냐고 하면서 저보고 나가래요. 엄마한테 다시 가든지요."
돈을 벌어야 한다고 고등학생 딸에게 아빠한테 가라고 하는 엄마, 그리고 다시 엄마에게 가라고 하는 아빠. 그런 가운데 영희는 설 자리를 잃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 전에 할 수 없이 아빠에게 왔는데 방이 하나거든요. 네 명이 같이 한 방에 자면 꼼짝을 못해요. 게다가 아빠는 매일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구요. 할머니도 아프세요. 저도 저지만 제 동생만 생각하면 너무 불쌍해서…. 조금씩 남들이 도와주는 돈으로 사는데 동생이 버스비가 없어서 학교에 못 간 적도 있어요. 아빠, 엄마! 아니예요. 그런 사람 저에게는 없어요."

교회 간 적 없어요
급기야 영희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렇다. 영희도 측은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동생이, 한참 아빠, 엄마의 사랑을 받아야 할 아이가 그렇게 힘겹게 살고 있음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영희에게는 먼저 위로가 필요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미운 마음도 제거되어야 했다. 결국 영희도 마음 가운데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만날 때면 아이들 자체보다 이렇게 가정의 문제, 부모의 문제를 만날 때가 많다.
"영희야, 오늘 무척 어려운 이야기를 해줘 고맙다. 선생님이 어떻게라도 돕고 싶은데 어찌해야 할지…. 그래, 다른 것은 못해도 기도는 하마. 영희는 하나님 믿고 있니?"
"아뇨. 교회에 가 본 적도 없어요."
"그래. 그럼 교회에 가고 싶었던 적은 있니?"
"네, 하지만 시간도 허락질 않고요. 아르바이트라도 해야잖아요."
"그래, 선생님이 보았을 때 영희 너에게는 정말 위로와 평안한 마음이 우선적으로 있어야 할 것 같아. 금방 상황이 바뀔 만한 것은 없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그 상황과 관계없이 평안함을 주시거든. 영희야. 이번 기회에 예수님을 만나면 좋을 것 같아. 네 힘으로 하기 어려운 것 모두 하나님께 기도 제목으로 올려드리고 그렇게 기도하며 매달리면 하나님께서 네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이 틀림없어. 그리고 교회에 나가고 말야. 선생님은 걱정이나 고민되는 일이 없어 보이니? 사실 있어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니까 항상 이렇게 웃으며 지내는 것이거든. 어떠니? 영희야. 네가 원한다면 지금 기독교가 무엇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개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영희의 얼굴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어떠한 문제도 해결된 것은 없지만 그 해결점을 찾았다는 듯이.

영접기도를 하고
나는 4영리를 준비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영희는 크고 또렷한 소리로 따라 읽었다. 그리고 영접기도도 하였다.
"영희야. 정말 축하해.그리고 이제는 네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너 혼자의 문제가 아니야.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실거니까. 무엇보다 천국 시민된 것을 축하한다. 어때? 기분 좋으니?"
"네, 선생님. 마음이 편안해요."
나 역시 감사하고 기뻤다. 한 영혼 한 영혼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그 감격 은 항시 새롭다. 영원하신 하나님 품안에 우리가 안길 수 있다는 것.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준비한 약간의 물질을 영희에게 건넸다.
"영희야. 선생님은 오늘 너무 기쁘단다. 그리고 이 물질은 적긴 하지만 네 동생을 위해서 사용하렴. 차비는 꼭 챙겨주고, 네가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해야 하겠구나."
이야기를 하는 중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울먹이며 말하는 내 목소리에 영희는 이미 눈물을 쏟고 있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영희야. 이 물질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란다. 네가 이제 더욱 하나님께 매달리면 모든 것들을 다 주관하실 하나님이 주시는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너도 돈을 얼마를 벌든지 꼭 남을 돕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하면 돼. 그것이 곧 선생님을 기쁘게 하는 것도 되니까, 알겠니?"
"네, 선생님."
말을 마치고 나는 영희와 함께 기도했다.
"영희를 사랑하시는 주님. 오늘 영희를 새 생명의 길로 들어서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여러 어려운 가정환경 가운데 있지만, 가장 큰 복인 주님을 만나는 복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귀한 딸 삼아주셨사오니 가정의 문제 풀어주시고 무엇보다 영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귀한 딸로 조금도 부족함 없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기도는 계속 되고 영희와 나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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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그리고 가정의 문제를 잘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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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08
12:39:40 (211.112.148.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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